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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SPECIAL

편지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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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손으로 새기고,
기다림을 통해 숙성시킨다

소식은 이제 기다림이라는 걸 모른다. 스마트폰은 띵동띵동하며 쉴 새 없이 메시지를 실어 나른다. 영상통화 버튼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를 곧바로 만나게 해준다. 그러니 종이 위에 펜으로 써서 우표를 붙여 보내는 편지는 얼마나 구차한 일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만나는 편지들에 매료당하고 만다. 천천히 손으로 새기고, 기다림을 통해 숙성되는 마음. 현실에서 보기 어려울수록 그 가치가 더욱 귀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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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이어진 러브스토리

“오늘 집에 가는 언덕길에서 벚꽃 봉오리를 봤습니다. 여긴 벌써 봄이 오려 한답니다.” 히로코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옛 애인 이츠키의 주소를 찾아내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답장이 날아왔다. 동명이인인 여자 이츠키가 그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자 이츠키 역시 남자 이츠키를 떠올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오래된 마음을 더듬어간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영화 <러브레터>는 눈 덮인 산을 향해 소리치는 여주인공의 목소리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제목처럼 ‘편지’가 주인공이다. 오해를 만들어내기 딱 좋은 매체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절묘하게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와 첫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여자가 그 편지를 통해 이어진다.

펜은 말보다 진하다

몇 십 년 전에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펜팔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를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만나지도 않고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편지 속의 글귀가 어떤 수단보다 진실된 마음을 전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여기리라.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이와 미옥이가 주연 못지않은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보여주는 이유도 바로 그들의 연애편지에 있다.
물론 편지가 연인들만의 특권은 아니다. <응답하라 1988>에서 시종일관 무뚝뚝한 큰 딸 보라는 결혼식이 끝난 후 아버지 성동일에게 손편지를 건네준다. “난 늘 왜 말이 안 될까” 얼굴을 마주 보면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을 편지를 통해 천천히 펼쳐낸다. 아버지도 그 마음을 잘 안다. 그 역시 딸이 신혼여행을 갈 때 들고 가는 가방 안에 편지를 넣어둔다. “27년 전 딱 이맘 때였다.”그에게 가장 큰 선물이 어떻게 배달되어 왔는지를 이야기해준다. 이런 편지들 때문인지 <응답하라 1988>이 방영된 2015년에는 편지용품 판매가 급증했고, 특히 남성 구매자가 두 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편지지 앞에 펜을 들고 앉아 있으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해지는 경우가 많다.

컨텐츠 이미지 편지 속의 글귀가 어떤 수단보다 진실된 마음을 전한다

나에게 쓰는 편지

지금 당장 편지를 보낼 연인이나 친구가 없다고 아쉬워하지 말라. 그럴 때는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보자. 드라마 <도깨비>에서 기억을 잃고 살아가던 은탁은 캐나다에서 자신이 부친 편지를 받는다. “기억해. 기억해야 돼. 넌 그 사람의 신부야.” 은탁은 편지의 발송지를 찾아 캐나다의 호텔에 찾아가는데, 거기엔 황금빛의 오래되고 거창한 우체통이 있다. 호텔에서는 우편함의 통로 보수공사를 하면서 편지를 뒤늦게 발견해서 배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편지는 10년 전에 부친 것이었다. 우리도 그래 보면 어떨까? 언젠가 먼 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그곳에서 자신에게 편지를 써보는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부탁해 10년 뒤에 그 편지를 보내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 과거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는 일, 생각만해도 신기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기다려보는 일에 미소를 짓게 될테다.

글. 이명석(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