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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SPECIAL

아주 사소한 인문학

관계의 홍수시대를 건너는 법, 편지의 미학

커피,
달콤하고도
씁쓸한
감정이 보내는
신호들

커피 한 잔을 마주한 채 앉아 있는 우리들의 삶은 현재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매혹적인 맛과 향미가 부드러운 입맞춤처럼 달콤한 인연을 떠올리게 하고, 때로는 짙은 쓴맛에 그리운 추억이 묻어나와 잠시 흐트러진 마음이 위로받을 때도 있다. 우리들에게 남아 있는 많은 기억들이 커피를 마실 때마다 새록새록 뜨거운 감정의 꽃으로 피어난다.

뜨겁거나 혹은 차갑게, 추억을 깨우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살고 있던 하숙집은 일흔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집이었다. 장성한 아들 셋이 모두 결혼해 가정을 일궈 나가자, 소박한 정원까지 있던 이층집이 어느 순간에 너무 크고 적막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 방이 네 개나 있던 이층에 하숙을 치기 시작하셨다. 아침식사 시간에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분주히 부엌을 오가는 할머니 곁에서 할아버지께서는 늘 종이필터에 커피가루를 넣고 물을 부어 뜸을 들이셨다. 거품이 일어나며 표면이 부풀어 오르고, 곧 가라앉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할머니를 위해 내린 커피를 화려한 꽃무늬 잔에 옮기는 것은 우리 하숙집의 빠지지 않는 아침풍경이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 커피 향기가 골목길로 스며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더욱 감미롭게 만들었던 것 같다. 집을 떠나 부모님이 그리운 어린 하숙생들의 마음까지도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씩 원두의 분쇄까지 직접 그라인더를 돌리며 아날로그 방식으로 커피를 즐기셨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인스턴트 커피도 맛이 색다른 요즘 시대에 굳이 핸드드립 커피를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지금도 그때의 커피 향이 생각날 때면 조금 더 느린 방식의 슬로우 커피를 찾게 된다.

우리 하숙집은 매주 일요일 저녁이 되면 온 집안에 짜릿한 과일향수 내음이 풍겼다. 프라이팬에 생두를 한줌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볶고 계신 할머니 옆에 서서 그 맛을 궁금해 하는 우리들에게 할아버지께서는 젓가락으로 콩 하나씩을 집어 입에 넣어주셨다. 대학생이 되기 전에 커피를 맛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핀잔했지만, 내가 처음 맛본 짙은 갈색의 커피콩은 감미로운 신맛이 산뜻하면서도 초콜릿처럼 고소하여 강한 여운이 남았다. 내 인생의 커피와의 첫 만남은 바로 우리 하숙집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이든 아내를 위해 남편이 준비한 커피 한 잔은 사랑의 속삭임이며, 따스한 배려였다. 입안을 맴도는 한 모금의 은은함이 바쁜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내 기억의 잔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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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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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기

마법 같은 향기의 유혹

1600년경 이탈리아의 무역상들이 오스만 제국에서 커피를 가져오면서 유럽의 음료 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단맛과 짠맛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이 커피의 신맛과 쓴맛에 매료되었다. 장 자크 루소는 집 근처에서 커피콩을 볶을 때면 서둘러 창문을 열어 그 향기를 모두 받아들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폴 사르트르는 하루의 대부분을 카페에서 보냈는데, 10년이 넘도록 매일 정해진 시간에 커피 한 잔을 시키고는 그곳에서 몇 시간동안 집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베토벤은 커피를 끓일 때 커피콩을 일일이 세어 정확히 60알만 갈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들이 즐겨 찾는 카페의 시초는 커피하우스로, 1652년 유럽 최초로 런던에서 문을 열었다. 이곳에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을 비롯하여 상인과 일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편하게 드나들면서, 점점 커피의 마법 같은 효능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도 커피에 대한 애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각종 매체들이 커피와 건강과의 상관관계나 공정무역에 관한 뉴스 등을 지속적으로 내보내며,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는 커피 사랑에 가끔씩 제동을 걸 뿐이다. 바리스타들은 보다 신선한 생두와 좋은 로스팅, 솜씨 좋은 추출로 뽑아낸 커피가 최고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소비자 측면에서는 그러한 복잡한 과정을 알고 있지 않아도, 후각으로 느끼는 향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커피에 매료된다.

이것은 코로 맡는 단순한 냄새에 그치지 않는다. 혀가 느끼는 맛과 질감 이상으로, 아로마는 우리의 뇌 속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강렬한 감정을 되살리는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씨는 물론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함께 마셨느냐 등의 분위기가 아로마에 영향을 끼쳐 커피 맛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아로마 때문이다. 커피 향은 긴장이완 효과와 더불어 주의·기억능력과 같은 인지 기능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커피 한 잔

“당신들은 지금, 뜨거운 커피를 향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는 말은 1970년 우주를 날던 아폴로 13호가 산소탱크가 파열되는 사고를 당한 후 무사히 지구로 귀환할 때 휴스턴본부가 보낸 메시지로 유명하다. 위험한 상황을 극복한 승무원들을 격려했던 ‘뜨거운 커피’는 지구에서 기다리는 가족과 안도, 휴식을 상징하는 의미였다.
영국의 한 시인은 커피를 일컬어 ‘아픈 속을 낫게 하고, 기억을 돕고, 슬픈 이를 되살리며, 기운을 북돋는’이라고 표현했다. 직접 핸드드립을 하거나 로스팅 전문점에서 구입하거나, 또는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컵에 담긴 모든 커피의 향과 맛은 어떤 사람에게는 추억을, 그리고 영감을 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그래서 커피는 마시는 사람에 의해 그 맛이 결정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커피 한 잔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가 음료가 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커피 한 잔을 만난다. 아침 출근길에, 식사를 마치고, 회의를 진행하면서, 손님을 만날 때, 나른한 오후를 견디기 위해, 즐거운 약속을 기다리며, 집안청소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며, 대화가 있는 자리에서든 혼자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에도 커피가 생각난다. 커피는 이제 많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꽤 친숙한 존재가 된 지 오래다.
오늘도 우리는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한 모금이 고단한 하루를 보듬어준다.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커피는 그저 쓰기만 한 카페인 음료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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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 기

글. 엄익순(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