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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G Culture

길에서 만난 풍경

천하제일 비경

화순 적벽

화순적벽은 ‘조선의 10경’이라 불릴 만큼 이름만큼 하늘로 치솟아 오를 듯 하는 웅장함으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세월의 풍화가 새겨진 적벽과 청정 하늘은 수많은 풍류시인 묵객들에게 문학적·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컨텐츠 이미지 화순적벽을 보기 위해서는 투어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컨텐츠 이미지 물염적벽의 장엄함에 감탄하는 관광객들.
화순적벽은 1519년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양쯔강의 적벽에 버금간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곳이다.
빼어난 경관으로 호남8경의 하나로 손꼽히며 조선 10경으로 불렸다.

태고의 신비를 자랑하는 적벽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갈라지는 곳에 포근히 자리한 화순(和順)은 자연과 세월이 빚어낸 명승지가 많은 곳이다. 화순적벽이 그렇고 운주사가 그러하다. 화순적벽은 1519년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양쯔강의 적벽에 버금간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곳이다. 빼어난 경관으로 호남8경의 하나로 손꼽히며 조선 10경으로 불렸다. 동복댐 상류에서부터 약 7㎞ 구간에 형성된 물염·창랑·보산·장항적벽(일명 노루목적벽) 등 4곳을 합친 것을 화순적벽이라고 하는데 지난 해 국가 지정 명승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1971년 적벽이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되고, 1985년에 동복댐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됐을 뿐 아니라 인근 15개 마을도 수몰됐다. 수몰민들은 고향을 잃었지만 30년 가까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덕분에 적벽의 아름다움은 오롯이 보존됐다. 가을 단풍철에는 붉은 절벽과 다양한 단풍나무들이 어울려 절경을 이뤄 내장산과 백양사의 단풍과 달리 웅장함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화순적벽이다.
화순적벽은 섬진강 지류의 하나인 창랑천이 옹성산(해발 572.8m) 자락을 휘감아 돌면서 양 옆으로 수려한 절벽이 펼쳐진다. 그 중에서도 노루목적벽은 오래 전부터 수려한 경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가장 크고 멋있다고 알려진 노루목적벽은 산의 형세가 노루의 목을 닮았다는 의미에서 ‘노루목적벽’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산길에 노루가 많이 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동복댐이 공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마을 주민들이 나룻배를 타고 다녔던 화순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던 곳이었으며 모래사장과 소나무 숲이 있어 초등학교의 단골 소풍지였다.
노루목적벽은 보산적벽과 함께 투어를 통해서만 만나볼 수 있다. 적벽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매주 수, 토, 일요일 하루 2회(오전 9시, 오후 1시30분)에 만 원으로 이용할 수 있는 투어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모두 3시간 40분이 소요되는 투어버스는 물염적벽, 노루목적벽, 보산적벽을 볼 수 있다. 또 화순적벽과 운주사 등을 둘러볼 수 있는 설렘화순 버스투어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단 예약은 인터넷으로만 가능하다.
또한 노루목적벽 상류 지점에 위치한 물염적벽은 기암괴석과 노송, 비단결 같은 강줄기에 자리한 정자 ‘물염정’까지 더해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컨텐츠 이미지 CNN이 ‘한국에서 가봐야 할 가장 아름다운 곳 50선’으로 선정한 세량지.
컨텐츠 이미지 두 불상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운주사의 와불.

구름 시내 여러 번
꺾어진 끝에
아련히 외론 정자
눈에 들어와
붉은 돌 노을
기운 어리어 있고
푸른 숲엔
새들이 날아 내리네.

- 정약용 적벽강 정자에서 노닐며 -

풍류 문인이 사랑한 호남 10경

이렇게 아름다운 화순적벽에는 가슴 절절한 사연들도 전해진다. 조선 중종 때 이곳으로 유배 온 유학자이자 개혁 정치가 조광조는 사약을 받기 전 25일 동안 배를 타고 다니며 적벽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한을 달랬으며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은 적벽에 반해 수십 년의 방랑을 끝내고 13년 동안 화순에 머물며 시를 쓰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 바로 적벽 인근이었고 후손들이 강원도 영월로 이장하기 전까지 묻힌 곳도 바로 화순이었다.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이곳에서 조선 10경의 절경에 빠지지 않는 수려한 경관이라고 칭송하기도 했으며 다산 정약용은 아버지를 따라 온 화순적벽을 보고 열여섯의 나이에 <적벽강 정자에서 노닐며>란 시를 짓기도 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석천 임억령(1496∼1568)이 화순적벽을 보고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며 감탄했는데, 이는 적벽이 신선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실제 적벽을 마주한 이들은 이 말이 과장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2016년 광주·전남 상생발전 방안으로 적벽의 빗장이 풀리며 천혜의 속살을 드러낸 화순적벽. 30년간 베일에 싸여있던 장엄한 자태를 뽐내며 적벽을 찾아온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고즈넉한 산사와 감성 충전 숲길

화순군 천불산 자락에 위치한 운주사(雲住寺)는 신비한 내력을 간직한 천년고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왕건의 삼국통일을 예견했던 도선 국사가 하루 밤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세웠다는 불가사의한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은 운주사에 보물급 돌탑과 불상을 포함해 20여 기의 석탑과 80기 가량의 석불이 남아있다.
운주사의 백미는 두 불상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와불이다. 조각을 마친 후 등판을 분리시켜 세우는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탓에 누워 있게 된 것인데, 이는 승려 도선이 천불천탑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이 와불을 일으키려다 새벽닭이 울어 공사를 중단했다고 전해진다. 덕분에 와불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런 이야기가 알려지자 운주사 와불이 문학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소설가 황석영은 <장길산>에서 관군에 대패한 주인공 길산이 천민·노비들과 함께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한 장소로 그렸다. 또 정호승 시인은 ‘운주사 와불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는 <풍경달다>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한편, 운주사 가까운 곳에 초록빛 숲길이 쭉 뻗어있는데, 둔동마을의 ‘숲정이’(전라남도 기념물 제 237호)가 그곳이다. 둔동마을은 500여 년 전, 조선시대 초기에 마을을 따라 흐르는 동복천에서 실려 내려온 흙들이 쌓여 땅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숲정이는 마을 옆에 자리한 숲을 일컫는 순우리말로 동복천의 여름철 홍수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으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천변 둔덕에 700m 정도로 이어지는 초록빛 숲길은 걷기만 해도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컨텐츠 이미지 하룻밤에 천 여 개의 불상과 불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운주사.
컨텐츠 이미지 하늘에서 바라본 화순의 풍경.
글. 최승희(여행작가)
사진. 신규철, 최승희, 화순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