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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G Culture

그땐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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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고,
행복한 여행

소풍

소풍을 떠나기 전 두 손 모아 내일 날씨가 맑고 화창하기를 빌고 또 빌었지만 다음날 날씨는 여지없이 비가오고 바람이 부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둘러앉아 먹는 김밥은 얼마나 맛있던지 마음 속에 답답한 바람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엄마 김밥이 최고였던 초등학교 소풍

봄바람이 솔솔 부는 4~5월이 되면 초등학교와 중학교 아이들은 저마다 소풍 가방과 물통을 들고 소풍 길에 나선다. 1980년대에는 단연 미키마우스와 백설공주, 마징가제트 캐릭터가 그려진 소풍 가방이 인기였다. 어저께 시장에서 새로 산 마징가 소풍 가방에는 엄마가 정성으로 꾹꾹 눌러 싸주신 김밥과 사이다 한 병, 새우깡 한 봉지가 얌전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물론 형편이 조금 넉넉한 친구들은 딸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과일을 함께 싸와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어차피 소풍 도시락은 친구들과 모두 함께 나누어 먹기 마련이니 오늘은 귀한 딸기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의 인솔 하에 한참을 조잘조잘, 재잘재잘 걷다보면 어느새 소풍 장소에 도착하기 마련이다. 소풍 가방이 궁금한 아이들의 마음을 눈치 챈 선생님들은 서둘러서 점심부터 먹으라고 알려주신다. 친구들과 함께 신문지나 돗자리를 깐 뒤 다정하게 둘러앉아 도시락을 나눠먹는 재미는 그야말로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그저 흔히 먹는 김 위에 밥을 얹고, 계란과 소시지, 시금치나물을 함께 넣어서 만 것뿐인데 언제나 우리 엄마의 넉넉하고 포실한 김밥이 가장 맛있다는 사실이 어깨가 으쓱할 정도로 기분 좋았다.
점심을 먹고 나면 선생님들이 숨겨 놓은 보물찾기가 우리를 기다렸다. 김밥을 먹고 보물찾기를 하던 어린이대공원, 서오릉, 동구릉, 안양유원지는 모두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가고 또 가던 소풍 장소였지만 갈 때마다 즐겁고 신나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잠시잠깐 허용되던 일탈

소풍 장소도 대개 초등학교 때 자주 가던 곳이라 심드렁할 뿐이다. 하지만 하루 수업을 하지 않고 아무 걱정 없이 놀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더구나 운이 좋으면 옆 학교에서 소풍을 온 여학생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물론 소풍을 와서까지도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는 선생님들 때문에 곤욕을 치룰 때도 있지만 늘 까막머리 친구들과 함께 지내다 저렇게 예쁜 여학생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건 소풍 때가 아니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소풍 때문에 설레던 자리는 수학여행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강남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일본이나 캐나다 같은 선진국(?)으로 해외 어학연수를 떠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고등학생들은 기차나, 버스를 타고 경주나 부여 같은 곳으로 신나게 4박 5일의 긴 소풍을 떠났다. 숙소 식당에 마련된 디스코장에서 선생님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하고, 일찍 잠이 든 친구 얼굴에 치약을 발라놓기도 했으며, 선생님 몰래 경주 시내나 공주 시내를 구경하러 나갔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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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풍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2000년대는 소풍마저도 현장체험학습으로 이름이 달라졌다. 학습체험도 하고, 양이나 소에게 풀도 먹여주고, 두부 만들기나 소달구지 타기 같은 재미난 체험도 즐기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여전히 엄마표 김밥을 가져오는 친구들도 있지만 햄버거나 김밥식당의 김밥, 편의점 도시락을 가져오는 친구도 있다. 또한 자연스럽게 사먹는 친구들도 적지 않다. 꼭 친구들 손을 잡고 재잘 조잘 나섰던 소풍길이 더 재미있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어린 시절 흔히 볼 수 없는 넓은 세계를 보고 온 까닭이다.
이제 막 어른 흉내를 내기 시작하는 대학생들은 신입생이 되면 학교 이름과 학번이 크게 쓰인 과티를 입고 OT를 떠나거나, 과별로 MT를 떠난다. 억지로 술을 먹이고, 선배들의 얼차려가 말썽을 빚기도 하지만 고생 끝에 대학에 함께 입학한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봄 MT는 생각보다 근사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목련이 피고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면 학생들은 캠퍼스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 사진을 찍으며 소풍을 즐기듯 행복한 하루를 보낸다. 그 봄꽃 아래서 화사한 웃음을 터뜨리는 학생들은 지금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의 소풍을 떠나 왔는지 아마 쉽게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글. 이원복(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