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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G Culture

취향의 전쟁

피서(避暑)의 이중창,

설탕 수박과  참외

수박 vs 참외

여름이 빼꼼히 문을 열면, 크고 동그란 초록과 작고 갸름한 노랑이 얼굴을 내민다. 예전에는 원두막, 지금은 시장과 마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수박과 참외다. 그런데 어느 쪽에 먼저 손을 뻗을까? 커다랗게 한 입 베어 먹으면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수박인가, 아삭아삭 씹는 맛에 달콤한 과육의 향기까지 더한 참외인가?

수박과 참외의 원산지는 우리나라일까?

남아프리카의 초원지대에서 태어난 열대작물인 수박은 4천 년 전 이집트인들이 농작물로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를 거쳐 고려 시대 즈음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당시 원나라가 우리 민족을 지배할 때 앞잡이 노릇을 했던 홍다구가 가져다 심었던 탓에, 처음에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허나 조선 시대에는 팔도 곳곳에 덩굴을 뻗어, 탐스러운 자태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참외는 인도가 원산지로, 선사 시대부터 아시아와 유럽에 두루 재배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조선 성종 때 한겨울인데도 참외를 가꿔 임금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오랫동안 재배 기술을 발전시켜왔다는 거다.
영어로 코리안 멜론(Korean melon)으로 불릴 만큼 참외가 국내에서 생산과 소비되는 양은 압도적이다. 일본에서는 젊은 세대들이 아예 참외를 먹는 방법을 모르고, 한국에서만 나는 과일로 알고 있기도 한데, 1960년대 이후 멜론이 많이 보급된 이후로 참외를 거의 먹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박이 ‘세계적인 취향’이라면 참외는 ‘한국적인 취향’이다.
오랜 역사만큼 참외와 수박은 여러 전설과 설화에 얽혀 있다. 중국에는 칠석에 참외를 바치는 풍습이 고대부터 이어져오고 있고, 칠석에는 참외 밭에 들어가지 말라는 속설도 있다.
여수에는 1598년 일본군과 맞서 싸운 왜교성 전투를 배경으로 ‘벌통 수박’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의병들은 수박 속을 파낸 뒤 벌을 채워 바다로 띄워 보냈다. 왜군들은 맛있는 수박이 저절로 왔다고 좋아하며 깨뜨렸는데 수십 마리의 벌들이 튀어나와 혼쭐이 났다. 며칠 후 왜군들 앞에 또 다른 수박들이 떠내려 왔다. 이번에도 벌이 있을 거라 여겨 장작불 안에 던져 넣었더니 이번에는 폭약을 숨겨두었던 터라, 한꺼번에 터지며 왜군들을 몰살시켰다고 한다.

오랜 역사만큼 참외와 수박은 여러 전설과 설화에 얽혀 있다. 중국에는 칠석에 참외를 바치는 풍습이 고대부터 이어져오고 있고, 칠석에는 참외 밭에 들어가지 말라는 속설도 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박과 참외의 대결

수박과 참외는 그 맛에 있어도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둘 다 수분이 많아 갈증 해소용으로 아주 좋긴 한데, 수박의 수분이 95%나 되어 이쪽에선 앞선다. 오죽했으면 영어로 수박을 워터멜론(Watermelon)이라 부를까. 그런데 그 과즙을 먹기 위해서는 단단한 껍질을 제거해야 한다. 게다가 껍질은 버리는 경우가 많으니 쓰레기 처리도 곤란하다. 참외는 껍질이 얇기도 하고, 영양분이 많다고 껍질 째 먹기도 한다. 수박 안에 있는 단단한 씨앗도 골칫거리다. 참외는 씨 주변의 ‘태좌’에 달콤한 과육이 가득해 함께 먹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부분이 쉽게 상해 배앓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수박은 덩치가 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재미가 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1인 가족이 많아진 요즘에는 무턱대고 사 먹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수박이 주는 버라이어티한 재미를 놓치기는 아깝다. 수박을 한 입 크기로 파내 얼음과 청량음료를 더한 화채는 여름철의 대표적 디저트다.
붉은 색채가 주는 시각적인 풍성함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폐백 음식 중에는 수박 속을 거대한 꽃 모양으로 파는 ‘수박문양오림’이라는 기법이 있다. 참외는 단 맛을 즐기는 과일만이 아니라 반찬으로도 쓰인다.

하얀 부분으로 장아찌, 생채, 소박이, 나물 등 다양한 레시피를 즐길 수 있다. 수박에도 이런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제주도에서는 덜 익은 수박을 된장에 찍어 먹는다.
특이한 수박으로는 암록색의 껍질, 하얀 씨앗을 가진 무등산 수박이 있다. 예전에는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이었고, 지금도 생산량이 적어 선물용으로 주로 쓰인다. 최근에는 타원형에 속이 노랗고 식감이 좋은 망고 수박, 사과처럼 깎아먹을 수 있는 애플 수박도 나온다. 참외는 성주 참외의 지명도가 압도적이고, 품종으로는 1980년대 이후 ‘금싸라기’ 은천 참외가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성환 지역의 개구리참외는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일제시대에는 가장 인기 높은 참외였다. 개구리 등껍질 같은 검푸른 껍질 속에 붉은빛을 띠는 은은한 풍미의 과육이 들어 있다. 표피가 매우 얇아 운반할 때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대형 마트의 여름 과일 1, 2위는 단연 수박과 참외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체리, 멜론 등의 낯선 과일이 그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뜨거운 여름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된다면 국적이 뭔 소용이겠나? 그러나 수입 과일들이 먼 거리를 실려오는 과정에 지구의 대기를 더럽히고, 그로 인해 온난화를 가속시키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보자. 누구도 한반도를 일 년 내내 수박과 참외를 키울 수 있는 나라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참외와 수박의 1, 2위 자리를 지켜주자.

글. 이명석(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