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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SPECIAL

아주 사소한 인문학

그대의 아름다움이
모든 그리움이 되어,
노래 부른다

삶의 풍경이 된 노래는 악보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사람들 속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사랑을 속삭이고,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오늘, 그 노래들이 지친 우리들의 마음을 감싸안으며 위로해준다.

추억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5년마다 근무하는 학교를 옮겨야 할 시기가 되면, 늘 당신이 나고 자란 고향 가까운 지역에 발령받기를 원하셨다. 그렇게 초임 교직생활을 보내신 후, 내가 학교에 들어갈 무렵 드디어 시골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넓지 않은 터에 손수 벽돌을 쌓아올리며 집까지 지으셨는데, 아마 아버지는 자신의 모교가 있는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집을 짓기 시작해 1년이 지날 즈음, 드디어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이 옮겨지는 날, 우리집에서는 마을 잔치가 펼쳐졌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어도, 음식솜씨가 정갈한 어머니께서는 맛있는 잔칫상으로 동네 어르신들과 온가족들을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감나무가 있는 앞집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해 아들만 넷을 둔 이웃집 목수 아저씨 내외와 읍내에서 이발소를 하는 길 건너집 식구들 등 적지 않은 이웃사촌들이 모두 모였다.
한창 웃음꽃이 무르익을 때, 손님들이 삼삼오오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들은 이장님댁에 살고 있는 하숙생들이라고 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선남선녀들이 들어서자, 무엇이든 뚝딱 잘 고친다는 보일러집 아저씨가 자식자랑을 하듯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그러고도 몇 번을 더 여러 사람들이 자신을 소개하며 마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기억

Bridge Over Troubled Water

아무도 굳이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우리 동네의 실체에 대해서 곧 알게 되었다. 친구들은 물론 언니오빠들의 친구들도 우리 동네로 놀러 오고 싶지 않아했다. 우리집에 오셨던 젊은 분들은 모두 읍내의 초·중·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신 선생님들이셨다. 대부분 타지에서 발령을 받아 오신 분들이었는데, 처음에 한두 분 우리 마을에서 하숙을 하다보니 어느새 선생님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전근을 온 미혼선생님들뿐만 아니라, 가정을 일군 많은 선생님들도 우리 마을에 정착하셨다.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을 집에 와서까지 본다는 것은 학생들에게 그리 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잘 생긴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멋있었지만, 가끔씩 밤이 되면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팔각정에서 들려오는 색소폰 선율의 주인공이 바로 그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어린 나의 마음에 처음으로 큰 파도가 일었다. 도시와 달리 해가 떨어지면 일찍 하루를 마감하는 시골생활이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서른 가구들의 어른들이 대부분 뉴스를 들으면서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색소폰 연주를 시끄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선생님이 연주한 여러 음악들 중에서, 내가 기억하는 노래는 사이먼&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이다.
선생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독 그 노래를 많이 연주하셨다. 당시에는 그것이 팝송인줄도 몰랐지만, 얼마 후 즐겨듣던 라디오 프로그램 DJ의 소개로 그 곡의 가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게 되었다.
어느 일요일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선생님의 하숙집에 가게 되었을 때, 방문이 열려 있는 선생님의 방을 몰래 훔쳐보게 되었다. 방의 삼면에는 모두 책이 가득한 책장이 놓여 있었다. 종종 마을 팔각정에서 엿들은 어른들의 대화처럼, 정말로 선생님의 방에는 책이 많았다. 어려운 시골 살림에 제때에 공과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의 수업료를 대신 납부하기도 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에게 간식도 자주 사줘 월급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체육대회 때에는 학생들보다 더 달리기를 잘하고, 책을 사는 것 외에는 자신을 위해 쓰는 돈에 인색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방학 때에도 늘 하숙집에 머무는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물론 동네 사람들 역시 선생님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첫사랑

마음속에 간직한
나만의 노래

다른 선생님들이 발령을 받아 한두 명씩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 다시 새로운 선생님들이 마을로 들어오셨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은 여전히 우리 마을에 계셨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은 먼 거리의 학교로 발령을 받았지만 이사를 가지 않은 채 새벽출근을 하셨다. 고등학교를 도시로 진학하며 집을 떠나올 때 부모님과의 헤어짐도 슬펐지만, 이제 선생님의 색소폰 연주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서운했다.
드디어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집으로 내려왔을 때, 나는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며칠 전 야간자습이 끝나고 밤늦게 퇴근하시던 선생님이 음주운전 차량에 덮여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선생님의 마지막 길은 동네 사람들이 함께했다고 한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생님의 부모님 역시 교통사고로 함께 일찍 세상을 떠나셨는데 과거 신혼여행을 왔던 우리 마을 인근의 사찰에 두 분을 모셨다고 했다. 그래서 외아들인 선생님은 부모님이 그리워 서울에서 이곳으로 전근을 오셨고, 모두들 가족 같은 우리 마을이 좋아 떠나지 못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의 ‘첫사랑’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선생님이 생각날 때면, 수많은 노래 중에서 왜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의 가사가 떠오르는지 모른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내 맘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잊어야 한다는 이 노래의 제목은 거짓말이다.
창틈에 새벽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다가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사랑한다는 말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니까 말이다. 누구에게나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는 여러 빛깔의 그리움. 불현듯 그 아름다운 시절이 떠오를 때면, 우리들은 모두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선생님! 그곳에서도 제 노래가 들리시나요? 보고 싶습니다!”

글. 엄익순(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