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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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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목에서 도서관 순례까지

각양각색
피서(避暑)법

연일 기온이 치솟고 있다. 날이 더워질수록 ‘올해 여름은 또 어떻게 보내나’ 하는 걱정도 덩달아 커지는 중이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등목에서부터 책 읽으며 더위를 식히는 독서 피서(避暑)법 까지. 각양각색 피서의 변천사를 따라가 보자.

물 한 바가지로 더위를 씻어내는 등목

에어컨이 없던 시절 한여름을 지내야 했던 때의 초저녁은 늘 한결같은 풍경이었다. 온종일 일하고 오신 아버지는 하루의 피곤을 씻어내듯 등목을 하셨다. 아버지의 등골을 타고 차가운 물이 흘러내리자마자 ‘으허허’ 하는 괴성이 온 집안에 퍼졌고, 우리는 깔깔대며 한바탕 웃었다. 가족들의 소리만으로도 더위가 가시는 것 같은 날들이었다.
아버지는 등목을 마치고 흰색 순면 러닝을 입으시고는 밥상 앞에 앉으셨다. 등골 서늘하게 하는 에어컨은 없지만, 등물 몇 바가지와 선풍기 바람이면 더위를 씻어내기 충분했다. 그렇게 저녁을 먹은 뒤 가족은 대자리에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하나뿐인 죽부인을 차지하기 위해 밤마다 펼쳤던 눈치작전도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 추억이다.
대자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피서 아이템이기도 하다. 그가 유배지에서 더위를 없애는 여덟 가지 일을 주제로 지은 시 ‘소서팔사(消暑八事)’를 보면 깨끗한 대자리 위에서 바둑을 두는 것을 신선놀음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 외에도 소서팔사에는 재미있는 피서법이 많다. 큰 나무에 그네를 걸고 아래로 위로 오르내리며 바람을 가로지르는 것, 달 밝은 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법 등 간단하지만 지혜가 돋보이는 노하우들이다.

세월이 가도 더울 땐 역시 바다와 계곡으로 GO

시원한 곳으로 떠나는 것만큼 좋은 피서법도 없다. 50~60년대에도 사람들은 가까운 계곡이나 한강, 유원지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기차나 버스를 타고 해운대, 대천 해수욕장으로 떠났다. 1956년에는 대천해수욕장으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열차를 증설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도 시원한 물을 찾아 계곡으로 바다로 떠난다. 다만 예전처럼 파도를 타고 계곡물에 몸을 담그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서핑이나 래프팅처럼 시원함과 재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편이다. 낮 동안 차가운 물속에서 더위를 피했다면, 밤에는 친구들과 빙 둘러앉아 등골 오싹한 귀신 이야기를 하며 더위를 잊기도 한다. 폐가나 폐교 등을 찾아 공포체험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여름날의 공포 영화 관람, 공포 소설 읽기는 피서 공식으로 통하기도 한다. 초등학생 시절, 여름이면 안방을 찾아온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 무덤에서 튀어나온 시체가 “내 다리 내놔, 내 다리”라고 말하며 한 여인의 뒤를 쫓는 모습에 그 더운 날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봤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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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피하는 것도 개인 취향의 시대

거창하게 산으로, 바다로 떠나지 않더라도 누구나 더위를 피하는 작은 노하우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최근에는 ‘집 떠나면 고생’이라며 어디로 떠나야 하는 것에 반기를 들고 집에서 피서를 즐기는 사람도 늘고 있다. 여기엔 1인 가구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영향이 있다.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통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밀린 드라마나 영화, 만화책을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해 먹는 등 평소 누리지 못한 여유를 즐기며 더위를 잊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일명 ‘소확행’이 아니겠는가.
이뿐 아니다. 앉아 있는 내내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주는 시원한 동네 도서관을 내 집처럼 드나들기도 하고, 잠깐씩 이동하는 동안 휴대용 선풍기를 내 몸처럼 가까이 하는 방법도 좋은 피서법 중 하나다. 입 안이 얼얼해지도록 팥빙수를 먹는 것도, 이열치열이라 여기고 운동을 하거나 매운 음식을 먹으며 땀을 빼는 것도 나름 일리 있는 피서법일 터.
올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어떤 무기를 장착했는지 자못 궁금해지는 여름밤이다.

글. 정임경(자유기고가)
일러스트. 이신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