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 영역

컨텐츠 내용

THEME SPECIAL

아주 사소한 인문학

Muse

나를 살게 한
내가 사랑 한
뮤즈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연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이에게는 부모나 형제가 누군가에게는 직장동료가 그러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인생을 단숨에 바꿔놓았다는 이도 있다.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예술가들에게 인연은 특히 남다르다. 뮤즈(Muse)라고도 하는 그 인연은 예술가들의 혼에 숨을 불어 넣고, 놀라운 세계를 창조하는 힘을 가진다.

“그녀는 내 인생의 소금이며,
인격을 강하게 해 주는 목욕이며, 나를 표현해 주는 동화다”
Salvador Dali & Gala Dali

살바도르 달리와 갈라 달리

“나의 그림은 모두 당신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가 그의 뮤즈이자 부인이었던 갈라 달리(Gala Dali, 1894~1982)에게 남긴 말이다.
1930년대부터 자신의 작품 모두에 ‘갈라와 살바도르 달리’라고 서명할 만큼 갈라를 사랑했던 달리는 그녀를 단순한 사랑의 대상이 아닌 영혼의 동반자, 불안한 내면을 달래주는 안식처로 여겼다.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했을 때에도 “나는 초현실주의 자체이니까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못한다.”고 단언했을 정도로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스스로를 천재 예술가로 칭했던 괴짜 살바도르 달리는 일생 동안 현실 부적응에 시달렸으나 그것을 축복받은 예술성으로 내세웠던 화가다. 안하무인에 가까웠던 25세의 예술가를 사로잡은 건 당대의 시인이었던 폴 엘뤼아르의 부인 갈라였다. 달리는 10년 연상의 그녀를 마음에 품었고 어느 날 산책길에서 무릎을 꿇으며 사랑을 고백했다. 갈라의 화답으로 동거생활을 시작한 두 사람은 수십 년 뒤 폴 엘뤼아르가 사망하자 정식 부부가 되었고, 이후 달리는 갈라를 모델로 삼아 <갈라의 삼종기도>, <갈라리나의 초상>, <포르트 리가트의 마돈나>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달리의 천재성을 깊이 이해했던 갈라는 뉴욕 사교계에 달리를 진출시켜 명성을 높였고, 무엇보다 내면이 극단적으로 불안정한 그를 보살펴 예술성이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했다. 예술혼에 불을 당기는 뮤즈이자 사업 매니저, 그리고 평생의 아내였던 갈라가 죽은 1982년 이후부터 세상을 떠난 1989년까지 달리는 단 한 점의 작품도 남기지 않았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 컨텐츠 이미지
  • 컨텐츠 이미지
Marie Laurencin & Guillaume Apollinaire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파리는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좋은 시대)로 불리며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문화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과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는 그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파블로 피카소가 그들을 처음 이어주었을 때 아폴리네르는 27세의 천재 시인이었으며, 로랑생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막 구축해 나가고 있던 24세의 여류화가였다. 불같은 사랑에 빠져든 아폴리네르는 “그녀 이상으로 사랑할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며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시집 <알코홀>의 주요 작품들을 비롯한 수많은 시를 쏟아 내게 된다.
로랑생의 작품세계 역시 활기를 띠었다. 우울한 사실주의적 색채에서 벗어나 그녀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 ‘야수파의 소녀’라는 별칭을 얻으며 화단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두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이 불우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로랑생은 둘째 부인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고, 아폴리네르 역시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나 세간의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아픔을 공유한 그들은 급속도로 사랑을 키우며 예술에 찬란한 청춘의 빛을 드리웠지만, 5년 뒤 1911년 루브르 박물관 전시실에서 발생한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아폴리네르가 연루되면서 결별하고 만다.
1912년 기욤 아폴리네르는 실연의 아픔이 깃든 시 <미라보 다리>를 발표해 세계적인 반향을 얻었고, 마리 로랑생은 독일인 남작과 결혼해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끝난 것 같았던 둘의 사랑은 미처 끝맺지 못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에 걸린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에게 ‘당신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나는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죽을 것 같습니다.’라는 전보를 보낸 뒤 사망한다. 로랑생 역시 1956년, 한 손에는 흰 장미를, 다른 한 손에는 아폴리네르의 편지다발을 안은 채 영면에 들었다.
사랑은 비록 죽음 앞에선 힘이 없지만, 그의 펜촉과 그녀의 붓끝에서 예술로 아름답게 피어나 영원으로 새겨졌다.

“이브 생 로랑과 나의 밀접한 관계는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Yves Saint Laurent & Catherine Deneuve

이브 생 로랑과 카트린 드뇌브

영화 <세브린느>는 의사인 남편 피엘과 유복하게 살고 있지만 남편에게서 소외감을 느끼는 여인 세브린느 세리지의 이야기다. 여성의 욕망을 세밀하게 그려낸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수작으로서, 세브린느 세리지 역을 맡은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 1943~)의 연기력을 입증한 작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기념비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카트린 드뇌브와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인연이 눈부시게 빛을 발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브 생 로랑은 보수적이면서도 섹슈얼하고, 세련된 절제미의 의상을 디자인해 파격적 일탈을 꿈꾸며 마음속 욕망을 억누르는 여주인공을 입체적으로 완성시켰다.
프랑스인들이 ‘파리 오트 쿠튀르의 황태자’라고 일컬었던 이브 생 로랑(Yves Saint-Laurent, 1936~2008)은 21세였던 1957년 패션계에 등장해 2002년에 은퇴할 때까지 20세기 후반 세계의 패션에 혁신적인 이정표를 제시했던 디자이너다. 그는 스트리트 패션을 오트 쿠튀르 무대에 옮기고, 치마 일색이었던 당시 여성복에 과감히 바지를 도입하는 등 남다른 행보를 이어갔다. 그러한 그의 곁에는 진정한 우정으로서, 영감을 주는 뮤즈로서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던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가 있었다.
지적이고 섬세한 조각과 같은 미모 뒤에 도발적인 섹슈얼리티를 갖춘 그녀를 뮤즈로 삼아 그는 <세브린느> 이외에도 <열애>, <악마의 키스> 등 여러 영화 의상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의 패션쇼 맨 앞자리는 늘 드뇌브를 위해 비워져 있었다.
‘뮤즈(Muse)’의 사전적 의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으로서 춤과 노래·음악·연극·문학에 능하고,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존재다. 생 로랑에게 드뇌브는 이성애의 대상은 아니었으나, 예술적 영감을 주는 창조적인 뮤즈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디자이너와 여배우의 우정은 전 세계 패션사에 잊히지 않을 족적으로 남았다.

“그녀와 함께라면
시간도 멈춘 것 같았다”
Muse
Andy Warhol & Edie Sedgwick

앤디 워홀과 에디 세즈윅

2006년 개봉한 영화 <팩토리 걸>에는 ‘앤디 워홀과 그의 뮤즈, 그들의 매혹적인 기억’이라는 부제가 걸렸다. 포스터에는 짧은 숏컷에 숱 많은 속눈썹, 한쪽 볼의 점, 그리고 진한 아이 메이크업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성이 등장한다. 1960년대 뉴욕의 패션 아이콘으로 인기를 휩쓸었던 에디 세즈윅(Edie Sedgwick, 1943~1971)이다. 물질적으로 부유했으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부모 아래서 자란 세즈윅은 거액의 재산을 물려받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 뉴욕으로 건너온다. <보그(VOGUE)>를 비롯한 유명 패션잡지들의 커버를 장식하며 단숨에 뉴욕 사교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그녀는 얼마 되지 않아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워홀과 세즈윅은 무섭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워홀의 뮤즈가 된 세즈윅은 이내 그의 아트그룹 ‘팩토리(Factory)’의 일원으로 합류하면서 그의 영화에 13편 이상 출연하는 등 ‘팩토리 걸(Factory Girl)’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예술 활동에 풍부한 영감을 선사했다. 왕성한 모델 활동으로 본인의 영역을 넓혀나가며 대중의 관심 또한 놓치지 않았다. 매일이 파티와도 같았던 눈부신 시절도 잠시, 늘 새로움에 목말라 있던 워홀은 세즈윅에게 점차 흥미를 잃었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오해로 관계는 파국을 맞이한다. 이별 뒤 세즈윅은 순탄치 않은 연애와 우울증에 시달리다 약물에 손을 댔고, 결국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호흡곤란으로 눈을 감았다. 뮤즈로서의 시간도, 그녀 자신의 인생도 일순 타오르다 꺼져 버린 불꽃처럼 무척이나 짧았지만 그녀의 영향만큼은 오래도록 갔다. 앤디 워홀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세즈윅과 함께 일하던 때로 회고했으며, 금발 숏커트에 독특한 귀걸이, 짙은 아이 메이크업은 1960년대의 대표적인 패션 스타일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나의 존재가 타인의 삶을 뒤흔든다는 것, 나의 삶이 타인으로 인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은 일견 두렵기도 하지만 분명 경이로운 일이다. 서로 다른 해안으로 파도처럼 밀려 들어와 마침내 하나의 거대하고 새로운 바다를 이루는 것은 사랑만이 가지는 신비로운 힘일 테니까. 나는 지금 누구와 어떤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글. 성지선(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