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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G Culture

길에서 만난 풍경

서해의 보물섬

한국의
갈라파고스

옹진 굴업도

섬에는 그리움이 있다. 섬사람들은 바다 건너 육지를 늘 그리워한다. 육지 사람들도 수평선 저편에 아스라이 보이는 섬을 막연히 그리워한다. 이 까닭모를 그리움은 어느 섬에 머무는 동안에도 무시로 파도처럼 밀려들곤 한다. 옹진 굴업도는 섬 특유의 그리움과 애틋함이 진하게 느껴지는 섬이다. 자연풍광도 아름답고 바다 빛깔이 투명해서 서해안 최고의 섬 여행지로 손꼽힌다.

굴업도에는 ‘한국의 갈라파고스’ ‘서해의 진주’ ‘서해의 보물섬’ 등의 수식어가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자연풍광이 수려하고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 굴업도 개머리언덕 가는 길의 수크령 군락.
    9월 중순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굴업도 서섬의 붉은 해변과 작은말의 식수원이었던 저수지.
    뒤편에 덕물산이 우뚝하다.

자연생태계 그대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섬

굴업도는 경기만의 작은 섬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억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 말에 화산분출로 생겨났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엎드려서 뭔가를 파내는 사람 모양이라고 해서 굴업도(堀業島)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굴업도는 본섬인 덕적도를 비롯해 문갑도, 울도, 백아도 등과 함께 덕적군도를 이룬다.
전체 면적은 1.71㎢(51만 7,200여 평), 해안선의 길이는 12㎞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한국의 갈라파고스’, ‘서해의 진주’, ‘서해의 보물섬’ 등의 수식어가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자연풍광이 수려하고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굴업도는 섬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백사장, 갯벌, 무인도, 해안사구, 연륙사빈(목기미해변), 해안절벽, 주상절리, 간조육계도(토끼섬), 해식와(海蝕漥), 초원, 숲, 습지 등의 독특한 지형과 빼어난 절경들이 즐비하다. 대부분 억겁의 세월동안 파도와 바람과 소금기 등의 자연이 만들어 놓은 유산들이다.

(왼쪽)목기미해변 주변의 유리처럼 투명한 바다. (오른쪽)굴업도를 찾은 이들에게 작은 웃음을 선사하는 ‘고씨명언’.

목기미해변을 따라 느긋하게 거닐며 서섬에서 동섬으로

인천 앞 바다의 섬이라 하나 굴업도는 의외로 가는 길이 멀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단번에 가는 정기 여객선이 없는 탓이다. 먼저 덕적군도의 본섬이자 옹진군 덕적면의 면소재지 섬인 덕적도로 가야 된다. 쾌속선을 타고 1시간 10분쯤 달려간 덕적도의 진리선착장에서 다시 철부선 나래호로 갈아타고 1~2시간을 더 가야 굴업도에 닿는다. 짧지 않은 뱃길이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유람선처럼 느긋하게 떠가는 나래호의 갑판에서 덕적군도의 여러 섬들을 관조하듯 구경하는 재미가 매우 각별하다.
굴업도에는 사람 사는 마을이 하나뿐이다. 동섬에 있는 큰말(마을)에만 열 가구도 안 되는 주민들이 모여 산다. 마을 뒤쪽에는 나직한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드넓은 백사장과 솔숲이 드리워진 마을이다.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편안하다. 이 섬은 원래 동섬과 서섬 2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목기미해변’이라는 연륙사빈(連陸沙濱)을 통해 하나로 이어졌다. 큰말과 굴업도해변, 개머리언덕 등은 서섬에 있다. 동섬에는 연평산, 덕물산, 코끼리바위등과 지금은 폐허로 변한 작은말이 있다.
작은말은 목기미해변 끝의 동섬 초입에 위치해 있었다. 192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마을의 앞바다에는 민어파시(波市: 고기가 한창 잡힐 때에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가 열렸다. 파시가 열리는 날에는 수백 척의 배와 수천 명의 어민,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규모의 해일이 마을을 덮쳐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민어의 어획량마저 급감하자 파시도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오늘날 목기미해변의 백사장에 줄지어 늘어선 전봇대와 마을 옛터에 덩그러니 남은 콘크리트 건물의 잔해가 그 영화롭던 시절을 말해주는 듯하다.

굴업도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코끼리바위

억새밭에 뒤지지 않는 9월의 장관, 수크령

굴업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개머리언덕이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백패커들도, 민박집에 여장을 푼 관광객들도 너나없이 서둘러 개머리언덕으로 향한다. 큰말에서 개머리언덕으로 가려면 굴업도해변을 가로질러 서어나무가 울창한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 이 가파른 언덕길을 10여 분쯤 오르면 완만하게 구불거리는 능선 길에 들어선다. 능선 길의 시작점에서 약 550m 거리의 소사나무숲 아래까지는 탁 트인 초원이다. 이곳에는 한때 소와 사슴이 방목됐다고 한다. 이제는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수크령 군락지로 탈바꿈했다. 볏과 식물인 수크령은 마치 이리(늑대)의 꼬리처럼 생겼대서 ‘랑미초(狼尾草)’라 불린다.
언뜻 봐서는 강아지풀 같다. 하지만 길쭉한 타원형의 이삭 꽃차례가 강아지풀보다 몇 배나 더 크다. 온통 수크령으로 뒤덮인 이 초원의 9월 풍경은 제주도의 억새밭이나 순천만의 갈대밭에 뒤지지 않을 장관이다.
수크령 군락의 끝에서 만나는 소사나무 숲길도 가파른 비탈길이다. 햇살 뜨거운 여름철에는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짧은 비탈길을 올라서면 시야 훤한 능선길이 시작된다. 또다시 수크령과 억새가 뒤섞인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어디선가 풀을 뜯던 사슴들이 인기척에 놀라 질주하는 광경도 종종 눈에 띈다. 안전거리를 확보한 사슴들은 잠시 걸음을 멈춘 뒤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이곳의 사슴들은 야생종이 아니다. 한때 사람 손에 길러지던 사슴들이거나 그 자손들이다. 어느덧 200마리 이상으로 번식한 사슴들은 완벽하게 야생에 적응한 듯하다.

캠핑 사이트로 제격인 굴업도해변의 솔숲.
TIP 숙식

1. 굴업도의 숙박업소는 굴업도 민박, 고씨 민박, 장할머니 민박, 숙이네 펜션 등의 민박집뿐이다. 식당은 따로 없고, 미리 민박집에 예약하면 식사할 수 있다. 민박하지 않아도 식사 예약이 가능하다. 캠핑을 하더라도 점심 두 끼 정도는 가급적 민박집에서 해결하는 것이 주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공정여행의 일환이다.

2. 백패커들이 선호하는 캠핑 장소인 개머리언덕은 화장실을 비롯한 편의시설이 전혀 없다. 여러 모로 불편할 뿐만 아니라, 엄밀하게 따지면 불법캠핑이다. 합법적인 캠핑이 가능한 굴업도해변의 솔숲 주변에는 샤워장, 화장실, 급수대 등의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생수, 음료, 맥주, 라면, 간식 등을 판매하는 민박집들이 가까이에 있는 것도 장점이다.

백패커들의 성지 개머리언덕

굴업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개머리언덕은 탁월한 바다 전망대이다. 사방으로 시야가 훤해서 탁월한 조망을 누릴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들이 죄다 내 것이다. 황홀한 일몰과 장엄한 일출,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와 밤바다를 밝히는 어화(漁火)까지도 나만의 풍경으로 오롯이 즐길 수 있다.
굴업도를 찾는 백패커들이 여러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며 이곳에 텐트를 설치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개머리언덕은 일몰 감상 포인트이기도 하다. 불덩이처럼 뜨겁고 붉은 해가 오렌지빛, 선홍빛의 노을을 남기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광경은 더없이 아름답고 황홀하다.
굴업도는 개머리언덕이나 큰말해변에서 하룻밤의 캠핑만 즐기고 오기에는 적잖이 아쉬운 곳이다. 동섬의 연평산에는 굴업도 최고의 천연전망대가 있다. 꼭대기에 올라서면 동섬과 서섬을 잇는 목기미해변, 굴업도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코끼리바위, 굴업도 최고봉인 덕물산과 붉은 해변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연평산을 오가는 길에는 코끼리바위를 지나칠 수 없다. 마치 사람이 조각한 것처럼 코끼리의 엉덩이와 뒷다리 부위를 쏙 빼닮았다. 이 바위의 진면목을 제대로 확인하려면 썰물 때에 맞춰서 찾아가는 게 좋다.
굴업도는 아주 매혹적인 섬이다. 한 번 다녀온 사람은 십중팔구 상사병을 앓기 마련이다. 어느 섬에서도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자연유산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인류 모두의 것이다. 그러므로 굴업도의 모든 것은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영원히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천혜자연의 보고(寶庫) 갈라파고스가 그러하듯.

굴업도해변의 밤하늘을 가득 뒤덮은 은하수.
글·사진. 양영훈(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