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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G Culture

문화가 있는 저녁

BOOK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선들

추석이 지나면, 왠지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남은 과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올해를 정리하고 내년을 기약하고 싶은 게으름도 수긍이 된다. 한 해뿐만이 아니라 더 긴 시간이나 일생을 놓고 봐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이맘 때 삶을 돌아보고 내다보는 시선들을 뒤적이는 까닭이다.

책 허수경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시인 허수경은 지난 1992년 늦가을 독일로 터전을 옮겼다. 살아가는 장소를 옮기는 일은 새로운 삶의 지평을 마주하는 도전이기도 하지만, 지난 삶의 터전이 얼마나 귀하고 깊었는지를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139편의 짧은 산문과 9편의 편지를 쓰며 “만일 서울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이 많은 이야기를 나는 친구들에게 했을 것”이라 말한다. 제목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에 대한 각자의 답변은 여전히 궁금하고, 그 답이 무엇이든 일단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말한다. 몸을 뉘일 작은 방 하나를 두고, 방학 때면 오리엔트로 발굴 답사를 떠나면서, ‘영원한 거처’의 의미를 묻고 찾았을 듯하다. 어디를 가려고 길을 나섰는지, 이 여행이 집으로 돌아가려는 여행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겠다 싶다. 이 책을 읽고 난 내 마음처럼 말이다.

책 다치바나 다카시 <자기역사를 쓴다는 것>

다치바나 다카시 <자기역사를 쓴다는 것>

일본의 독서가이자 저술가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는 50세 이상만 수강할 수 있는 ‘세컨드 스테이지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 강좌 제목은 ‘현대사 속의 자기 역사’로, 인생 후반전을 앞두고 스스로 전반전을 정리해보는 과정이다. ‘현대사 속의’라고 해서 거창한 역사의식을 덧붙이려는 게 아니라,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떠올리며 잊고 지낸 자신의 역사를 떠올려보자는 가벼운 제안이다.
이 강좌의 핵심은 ‘자기 역사 연표 작성’이다. 인생의 타임라인을 삶의 특색에 맞춰 구성하는 숙제인데, 어떤 이는 매 시기 인생에 얼마나 충실했느냐를 바탕으로, 또 어떤 이는 시기별로 획득한 능력 재산과 인맥 재산을 중심으로 연표를 구성했다. 책 속에 붙은 실제 연표를 둘러보며 자기 인생의 중심축이 될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강생들의 후일담도 눈여겨볼 만하다. “싫어했던 것, 괴로웠던 것이 조금씩 정화되면서 모든 일이 그리운 추억으로 자리해 갔다.”는 이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전한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시선은 시간이 흐르면 바뀔 게 분명하다. 그러니 나중에 다시 돌아보기 위해서라도 지금 한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책 이진순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이진순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작가 이진순은 ‘이진순의 열림’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6년 동안 122명의 사람을 만났다. 널리 알려진 유명인부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으로 자기 삶을 꾸리며 세상에 새로운 의미를 전한 이들까지. 책에는 그중 열두 명의 이야기만 담았다. “좌절의 상흔과 일상의 너절함 속에서도 세상에 대한 낙관과 사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모두의 이야기다.
완벽하지 않지만 ‘반짝’하며 빛나는 각자의 한 방, 즉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순간’이 풍성하게 그려진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돌아보면 좋을지 고민하는 당신이라면,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을 게 분명하다.
작가는 세상을 밝히는 건 “크리스마스트리의 점멸등처럼 잠깐씩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짧고 단속적인 반짝임”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거나 동경하는 데에서 한 걸음 물러나, 각자의 반짝임이 무엇을 뜻하고 어디로 향하는지 돌아보자. 마치 123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당신인 것처럼.

MUSICAL
뮤지컬 <마틸다> 해외공연 모습

무대 위
특별한 변주

친숙한 작품을 무대에서 새롭게 만나는 것은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내가 알던 작품이 무대에서 어떻게 변주되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공연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 올 가을, 각기 다른 원작들로 개성 있는 무대를 꾸린 세 편의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뮤지컬 <마틸다> 포스터

공연 : 9월 8일~2019년 2월 10일
장소 : LG아트센터
출연 : 황예영, 안소명, 이지나, 설가은, 김우형, 최재림, 방진의, 박혜미, 최정원, 강웅곤 등

뮤지컬 <마틸다>

웨스트엔드에서 건너 온 뮤지컬 <마틸다>는 2010년 초연 당시부터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금세 핫한 뮤지컬로 떠올랐다. 영국 올리비에상에서 베스트 뮤지컬상을 포함 7개 부문을 수상하며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을 세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난 9월부터 아시아 최초, 비영어권 최초 무대를 한국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뮤지컬 <마틸다>가 특별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유 중 하나는 원작이다. 우리에게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친숙한 작가 로알드 달의 동명 동화가 이 작품의 바탕이 된 것. 이미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동화인 만큼, 재미와 감동, 그리고 교훈까지 전해주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뮤지컬은 천재 소녀 마틸다가 어른들의 학대에 맞서는 원작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르되, 감각적인 무대로 색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호기심 많은 마틸다의 머릿속을 상징하듯 알파벳 퍼즐로 꾸민 무대, 아이들이 꿈을 노래하며 대형 그네를 타고 객석까지 파고드는 장면 등이 관객들을 동화 속 판타지로 초대한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포스터

공연 : 8월 31일~11월 18일
장소 : 백암아트홀
출연 : 임소하, 이지숙, 유리아, 강지혜, 신성록, 송원근, 성두섭, 강동호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진 웹스터의 명작 소설 <키다리 아저씨>가 무대에 올랐다. 작품의 주인공은 존 그리어 홈 고아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제루샤 에봇. 그녀는 의문의 남자에게 후원을 받아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후원자의 요청에 따라 매달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러던 중 룸메이트의 젊은 사촌 제르비스 펜들턴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와 자신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가게 된다.
2009년 미국에서 초연한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레 미제라블>의 오리지널 연출가 존 캐어드가 대본과 연출을, <제인 에어>의 작곡가 폴 고든이 음악을 맡아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무대를 풀어냈다. 또한 혼성 2인극이라는 구성을 택해 제루샤와 제르비스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원작 소설의 클래식한 감성을 무대에 옮겨와, 두 인물이 서로 주고받는 편지와 메시지를 따뜻하고 소박하게 풀어낸다. 특히 제루샤가 ‘행복은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이라 노래하는 ‘행복의 비밀’이 킬링 넘버로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2016년 국내에서 첫 선을 보인 <키다리 아저씨>는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으며,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포스터

공연 : 10월 18일~10월 21일
장소 :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출연 : 이소연, 김차경, 유수정, 윤충일 등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국립창극단이 2012년 김성녀 예술감독 취임 이후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개성이 강한 연극 연출가들과의 협업으로 창극은 고루하다는 편견을 벗어던지고,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창극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립창극단 최초의 18금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다.
변강쇠 타령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되다 유실되었는데,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으로 동아연극상, 대한민국연극상을 휩쓴 스타 연출가 고선웅이 극본과 연출을 맡으며 이를 해학적 창극으로 재구성하게 됐다. 작품의 주인공도 변강쇠가 아닌 옹녀. 원작에서 옹녀는 팔자 세고 나약한 존재로 그려지지만, 창극에서 그녀는 힘든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열정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옹녀의 적극성과 생활력은 현대 여성들의 공감을 불러내었고, 올해로 벌써 다섯 번째 시즌인 이번 무대는 만 18세 이상 관람가라는 제한에도 불구하고 2014년 초연부터 매년 매진 사례를 기록해왔다.

글. 박태근(북칼럼니스트), 나윤정(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