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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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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지만
확실한 위로앤디 워홀
그리고 고양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명이자 팝아트의 거장.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 예술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하며 현대 미술의 대표 아이콘이 된 앤디 워홀. 그를 수식하는 말은 거창하고,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화려하다. 그런데 아닐 때도 있단다. 26마리의 고양이와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고양이들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고양이는 신이 빚어낸 최고의 걸작”이라고 했고, 마크 트웨인은 “나는 고양이 친구이며 동지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며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리다 칼로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손꼽히는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고양이를 사랑하는 애묘인(愛猫人)이라는 것이다. 앤디 워홀(Andy Warhol) 또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동물을 좋아했는데 뉴욕 맨해튼의 연립주택에 살 무렵에는 무려 26마리의 고양이를 기르기도 했다.
앤디 워홀은 영화 <선셋대로(Sunset Boulevard)>의 여주인공이던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에게서 작고 푸른 샴 고양이 ‘헤스터’를 선물 받으면서 고양이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고양이 ‘샘’이 집에 오면서 그는 본격적인 ‘냥집사*’로서 활약해야만 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헤스터와 샘은 사랑에 빠졌고, 새끼 고양이를 낳았는데 낳고 또 낳은 것이 무려 24마리나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앤디 워홀이 샘을 닮은 아기 고양이 모두에게 똑같이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는 사실이다.
고양이들에게 앤디 워홀의 집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그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작업실을 어지르기도 했고, 빨간색 캠벨 수프 상자에서 놀기도 했다. 샘들 때문에 작업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잠자리까지 빼앗긴 앤디 워홀. 급기야 이웃의 불만까지 커졌고, 그의 고민은 깊어졌다.
고심 끝에 앤디 워홀은 종일 함께하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비를 들여 <샘이라는 이름의 25마리의 고양이와 푸른 고양이 한 마리>라는 책으로 엮었고, 190부를 지인들에게 나눠주면서 고민은 해결됐다.
파란색, 분홍색, 초록색 등 어느 화가의 작품 속 고양이들보다 패셔너블했던 ‘샘들’이 담긴 책이 소문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앤디 워홀은 그들의 품에 샘 한 마리씩을 안겨 보낸 것이다. 앤디 워홀과 26마리 고양이의 동거 생활은 그의 조카 제임스 앤디 워홀라가 지은 그림책 <우리 삼촌 앤디 워홀의 고양이들>에 잘 묘사되어 있다.

* 냥집사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 고양이를 뜻하는 ‘냥’과 주인을 모시는 ‘집사’를 합친 의미다. 개와 달리 감정이 얼굴이나 행동에 잘 드러나지 않고, 불러도 오지 않는 ‘도도함’을 유지하는 고양이의 특성에 빗대 ‘고양이를 모시고 산다’는 뜻으로 ‘집사’라 부른다.

컨텐츠 이미지 (왼쪽)앤디 워홀의 조카 제임스 워홀라가 어린 시절 삼촌 집에서 고양이와 함께 놀던 추억을 떠올리며 만든 책 <우리 삼촌 앤디 워홀의 고양이들>. 26마리의 고양이와 함께하는 앤디 워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오른쪽)앤디 워홀에 의해 재탄생한 아트카. 그는 “자동차의 속도를 화려한 묘사로 담아내고자 했으며, BMW M1이 빠른 속도로 움직일 경우 모든 윤곽과 색상은 흐릿해질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교감할 수 있었던 친구와 같았으리라.
더없이 소소하고 확실한 위로가 되는 친구.
많은 예술가가 고양이를 곁에 두는 것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다.

26마리 고양이의 집사, 앤디 워홀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넘어 뮤즈로서 고양이를 바라본 예술가들은 고양이로부터 받은 영감을 통해 많은 작품 활동을 했다. 앤디 워홀 또한 마찬가지다. 앤디 워홀이 책 <샘이라는 이름의 25마리의 고양이와 푸른 고양이 한 마리>에 그려 넣은 형형색색의 패셔너블한 고양이 연작은 그 어느 작품보다 앤디 워홀의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팝 아트의 선구자로 하나의 소재를 선정한 뒤 반복적으로 복제해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담아 스케치한 고양이들의 표정과 모습 하나하나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고양이를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양이에 대한 앤디 워홀의 애정은 일기에도 잘 드러난다. ‘캐서린이 고양이 지미가 카펫에 오줌을 쌀까 봐 고양이를 안락사시키려 했을 때’(1983년 9월 22일), ‘브리지드가 병든 고양이 빌리를 없애 버렸을 때’(1981년 5월 5일)에 그들을 ‘잔인하고 냉혹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앤디 워홀이 수많은 뮤즈 중 하나로 고양이를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중 소비 사회의 생산품인 콜라, 수프 캔 등도 마돈나, 마이클 잭슨과 동등한 시선으로 보고, 예술 작품으로 거듭나게 한 사람이 바로 앤디 워홀이다.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을 작품 소재로 사용한 그였기에 그의 사랑을 받는 고양이들은 뮤즈의 자격이 충분했다.
그가 고양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팝아트의 선구자로, 영화감독으로, 배우, 작가, TV 프로그램 제작자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온 앤디 워홀. 어쩌면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새로운 것, 세상에 없던 것들을 창작하면서 무수히 경험했을 외로움이 조용히 그의 곁을 지키는 고양이들로 해소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가장 가까이에서 교감할 수 있었던 친구와 같았으리라. 더없이 소소하고 확실한 위로가 되는 친구. 많은 예술가가 고양이를 곁에 두는 것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다. 실제로 <우리 삼촌 앤디 워홀의 고양이들>에 보면 샘과 헤스터는 앤디 워홀이 작업할 때 곁에 있는 걸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사람보다 2~3도 정도 높은 체온을 가진 고양이를 안았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은 정신없이 바쁜 그의 일상에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늘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앤디 워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은빛 가발을 벗어 던지고, 거실에 기대 앉아 고양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앤디 워홀의 모습은 어땠을지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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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임경(자유기고가)
일러스트. 이신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