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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SPECIAL

어쨋든 서재

서재, 누구의 방인가

한 집에 서재가 두 곳인 경우는 흔치 않다. 하나뿐인 서재는 거의 대부분 ‘아빠’의 방이거나 ‘남편’의 방이다. 어느 순간부터 ‘서재’라는 단어에 남자의 방, 남자의 로망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서재, 과연 누구의 방일까.

서방(書房)에서
서재(書齋)로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학교에서 설계수업을 받을 때의 일이었다. 각자 전문직을 가진 40대 부부가 살 집을 설계하라는 것이 과제였고 마침내 기말이 되어 외부의 건축가 선생님까지 초대를 하여 평가를 받는 자리였다. 아내의 서재와 남편의 서재가 별도로 마련된 것을 보고 건축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짧게 말했다. “서재는 그냥 하나만 있으면 돼. 아내는 남편과 서재를 같이 쓰면 되는 거야.” 그 말에는 서재가 남자의 방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결혼한 남자를 이르는 말은 ‘서방님’이다. 이는 자신의 남편뿐 아니라 시동생이나 시누이의 남편을 이를 때도 사용하며 또한 장인이 사위를 부를 때도 두루 쓰이는 말이다. 서방(書房)의 본래 뜻은 ‘책이 있는 책방’이며 서방에서 지내는 사람을 서방님이라 부르는 것이다. 서방이 지금은 서재(書齋)로 대체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서방과 서재가 남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인 것은 외국도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변해도
서재의 상징성은 그대로

고대 로마제국시절의 집을 보면 여성과 아이들이 머무는 안채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고 남자는 타블리눔(Tablinum)이라 불리는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타블리눔은 ‘테이블(Table)이 있는 방’이라는 뜻으로 요즘의 서재에 해당하는데 각종 문서와 서류를 보관하는 곳이자 가장이 손님을 맞이하는 방이었다.
중세시대에 서재는 각종 문서와 족보를 보관하는 골방과 비슷하게 위상이 하락하기도 했지만, 르네상스시기를 지나면서 서재는 다시 중요해진다. 그리고 18~19세기가 되면 서재는 남자의 품격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된다. 영화 ‘007 시리즈’의 주인공이나 ‘셜록홈즈’ 등으로 대표되는 모든 슈퍼 히어로물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중후한 서재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재는 항상 남성의 방이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보와 지식의 습득 및 동류계층과의 상호교류였다. 반면 여성의 공간은 육아와 가사에 전담하기 위한 침실과 주방이었다.
산업사회인 21세기도 마찬가지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서재는 남자의 가장 편안한 아지트이자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대피처로서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주택 내에서 여성과 아이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안방과 주방, 자녀방 등이 더욱 확대되면서 집 안에서 갈 곳을 잃은 남자들의 케렌시아로서 서재의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다. 대학 2학년 시절 내가 설계시간에 남편의 서재와 아내의 서재를 따로 마련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생각부터 깨보자

아직은
‘아내의 서재’가 낯설지라도

건축은 전통적으로 남성우위의 영역이어서 주택 설계 역시 남성의 시각으로 규정된다. 과거에 비해 향상된 여성의 지위를 주택 공간에 반영해 주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주로 안방과 주방을 확대 강화하는 방향이었다. 거실과 맞닿은 대면형 주방이 등장하고 안방에 드레스룸과 파우더룸이 부가된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기르기 위한 안방, 음식을 마련하기 위한 주방은 기존의 현모와 양처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공간이다. 즉 안방과 주방의 확대는 여성의 역할을 현모양처로 더욱 강력히 규정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30년 전의 교과서에는 아버지는 회사에 가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어머니는 집에서 자녀를 돌보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교과서의 삽화에는 의사는 남자로, 간호사는 여성으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여성의 사회진출은 늘어났고 가사와 육아는 남녀가 함께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남성 육아휴직까지 주지만 아직 ‘아내의 서재’는 낯선 모양이다.
현대의 주택사정을 생각해 볼 때 아내의 서재와 남편의 서재를 따로 마련하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공동으로 쓰는 서재는 사실상 아이의 공부방 역할을 한다. 현실은 각박해도 시작이 다르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생각부터 깨보자. 서재가 남성만의 전유물이라는 오랜 생각부터.

글. 서윤영(건축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