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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아
조금 나대도 좋아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다. 첫 등교날이 없으면 졸업은 없다. 첫 문장을 쓰지 않으면, 한 권의 책을 완성할 수 없다. 첫 고백의 두근 거림을 이기지 못하면, ‘오늘부터 1일’이라는 연인으로서의 첫 날은 오지 않는다. 처음은 설레지만 또한 서툴고 두렵다. 또한 그렇기에 ‘처음’ 다음 순간은 더욱 더 짜릿할지도 모른다.

| 이명석(문화평론가)

첫 순간의 모음이 그 사람의 자서전이 된다

처음 자전거에 올라타자마자 곧바로 균형을 잡고 앞으로 달리는 사람은 없다. 수없이 비틀비틀 페달을 굴리다 넘어진 뒤에야 어느 날 갑자기 슈~웅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첫 친구, 첫 소풍, 첫 입원, 첫 키스, 첫 월급통장, 첫 해외여행···. 누군가의 첫 순간만 모으면 그 사람의 자서전이 된다.
나는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겨울이 끝나가는 어느 저녁에 통장 아저씨가 와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과 누나가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놀려댔다. “너 이제 집에서 노는 것도 끝이야. 흐흐흐, 학교도 가고 숙제도 해야 해.” 입학식이 가까워진 것이다.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학교를 안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입학식 전날, 방 안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집 근처 전화국에서 일하던 외사촌 누나가 놔두고 간 거란다. 야구 만화 캐릭터가 홀로그램으로 박혀 있던 책가방.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학교 가는 첫날이 반짝이는 기대로 가득하게 되었다.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던 ‘처음’

그 당시로 말하자면 국민학교다. 나는 4학년 2학기의 첫 날도 아주 선명히 기억한다. 그날 새벽, 나는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탔다. 처음으로 전학을 가게 된 거다. 책가방을 둘러메고 새로 살 집을 찾아갔다. 주인집 할머니에게 인사한 뒤 학교에 가야 했는데, 엄마가 그때서야 도시락을 준비 못 한 걸 떠올렸다. 엄마는 나를 근처 중국집으로 데려갔고, 나무 도시락에 담긴 군만두를 가방에 담아 주셨다. 친구들과 나눠먹으라며. 전학간 학교에 도착 후 선생님의 소개로 새로운 급우들 앞에 섰다. 애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했다. “야구부로 유명한 학교에서 전학 왔단다.” 우와! 환호가 터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달려와 물었다. “너 야구부야?” 나는 고개를 저었고,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도시락을 먹었다. 나는 가방안의 만두를 꺼낼 용기가 없었다.
이후에도 몇 번의 전학이 있었고, 새로운 학교를 처음 가는 날은 기쁨보다 늘 두려움이 앞섰다. 그 전 학교에서 겨우 사귀었던 친구들과 헤어져 새로운 아이들과 만나야 하는 게 두려웠다.

그래, 누구든 죽는 날까지 매일 처음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니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그 처음들을 만나는 게 어떨까?
처음의 긴장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즐거움도 없다

‘처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대학교에 갈 때쯤부터 였다.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기대가 훨씬 컸다. 첫 기숙사, 첫 신입생 환영회, 첫 수업, 첫 MT···. 두세 번째는 기억이 흐릿한데, 처음 겪었던 일들은 또렷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물론 첫 미팅도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동문들과 작곡과 여학생들이 반포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클래식 음악이 은은히 흘러나왔는데, 쇼팽의 ‘이별의 왈츠’가 귀에 남았다. 몇 달 뒤의 첫 이별을 예고했던가 보다.
처음은 왜 그렇게 우리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을까? 기대와 설렘, 걱정과 불안이라는 감정이 최고조에 올라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툰 상황에서 혹시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당연하다. 하지만 또 낯선 무언가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은 콩닥콩닥 즐거운 박동을 한다. 분명한 사실은 처음이 주는 긴장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즐거움은 얻지 못한다는 거다.

하나씩 ‘처음’을 꺼내 먹어보자

나이가 들면서 처음을 경험할 일도 차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 처음을 기대하는 마음 자체가 시들어갔다. 솔직히 낯선 무엇을 경험하는 일이 점점 두려워졌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겁없이 덤볐지. 이젠 실수하면 주책이야.’ 그냥 익숙한 일,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게 마냥 편해졌다. 하지만 항상 거기에 머물러서는 결국 꼬들꼬들 말라버리고 만다.
TV 예능프로그램인 ‘꽃보다 누나’에 나온 배우 윤여정이 말했다.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그래, 누구든 죽는 날까지 매일 처음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니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그 처음들을 만나는 게 어떨까?
나는 가드닝, 스윙댄스, 바리스타, 수채화 등에 몇 년 주기로 도전해왔다. 처음의 설렘을 동력으로 조금씩 행복의 방법들을 만들어 왔다. 이번에는 그 처음이 탁구다. “제가 탁구는 처음이거든요.”, “제가 백핸드는 처음이거든요.”, “제가 시합은 처음이거든요.” 영화 <포레스터 검프>에 나오는 초콜릿 상자 처럼 그 ‘처음’들을 까먹어보자. 때로는 쌉쌀하고 때론 시큼하고 그러겠지. 하지만 먹어보지 않으면 진짜 달콤함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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