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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은 영원히 핑크!

분홍색이  말하는  

길었던 겨울이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꽃샘추위마저 물러간 뒤에는 메마른 대지에 분홍빛이 감돌며 꽃망울이 맺히고, 비로소 눈부신 봄이 차츰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슴에 희망을 틔우는 색상이자 심장박동을 헤아리는 유일한 컬러, 핑크의 계절이 도래했다.

| 성지선(문화칼럼니스트)

병에 맞서는 분홍빛의 리본

1991년 가을, 유방암 생존자들의 마라톤이 열리는 자리 에서 독특한 선물이 등장했다. 달리기가 시작되기 전 주최측이 참가자들에게 분홍색 리본을 나눠준 것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유방암에 대한 예방의식을 높이는 핑크리본 캠페인(Pink Ribbon Campaign)이 시작됐다. 이 캠페인은 건강이나 질환과 관련한 리본 캠페인의 효시로서 질병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을 촉구하는 데 지금까지도 큰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이 남는다. 왜 핑크였을까? 사실 핑크 리본은 손녀와 자매, 어머니까지 모두 유방암과 분투한 바 있었던 당시 68세 노인 샬롯 헤일리(Charlotte Haley)에 의해 탄생했다.
그녀는 국립 암 연구소의 암 예방 연구 예산을 늘려달라는 취지로 직접 복숭아색의 리본을 만들었는데, 마침 과거 유방암 예방 캠페인을 기획하던 코스메틱 브랜드 에스티 로더(Estée Lauder)의 수석 부사장 에블린 로더(Evelyn Lauder)의 눈에 이 리본이 띄었다.
리본을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에블린은 잡지 <셀프(SELF)>의 편집장 알렉산드라 페니(Alexandra Penney)와 함께 샬롯을 설득하기에 이른다.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결국 거절당했지만, 에블린 로더는 굴하지 않고 리본 캠페인을 추진했다. 이때 그녀가 선택한 컬러가 바로 핑크였다. 남성 유방암 환자를 고려한 핑크블루 리본이 등장한 것은 핑크리본 캠페인이 확산된 이후의 일이다.

pink
핑크 컬러가
여성을 상징하는
색상으로 쓰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핑크는 정말 여성의 색상일까?

핑크 컬러가 여성을 상징하는 색상으로 쓰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50년대와 1960대에 높은 인기를 구가했던 코스메틱 브랜드 에이본 코스메틱(Avon Cosmetics)은 분홍색 립스틱과 매니큐어를 출시하면서 여성을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색으로 핑크 컬러를 꼽았다. 잡지 <마드무아젤(Mademoisell)>은 분홍색 사무복을 입은 여성 모델을 표지에 등장시켰고, 자동차 기업 닷지(Dodge)는 ‘이보다 더 여성스러운 차는 없다. 오로지 여성만을 위해 만든 최초의 고급 자동차!’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라 팜(La Femme)’이라는 핑크 컬러의 자동차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미국 화장품 회사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Arden)이 ‘분홍의 완성(Pink Perfection)’이라는 광고를 론칭하며 여성 고객들을 공략하는 등 분홍과 여성성의 관계는 매스컴을 타고 끊임없이 확산됐다.
이는 문화적으로 ‘여성=핑크’라는 공식을 강화하는 데 큰 영향력을 미쳤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그 연결고리는 쉽게 끊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분홍을 남자아이의 색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다소 이채롭다.
1897년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서는 “분홍은 대개 남자아이의 색으로, 파랑은 여자아이의 색으로 간주되지만 어머니들은 자신의 취향을 따르면 된다.”고 권고했으며, 1914년 <아메리칸 선데이 센티널American Sunday Sentinel)>에서는 “기존의 전통에 따르고 싶다면 남자아이에게는 분홍을, 여자아이에게는 파랑을 입히라” 는 내용을 적고 있다. 당시 분홍색은 남성성을 뜻하는 혈기(피)에서 파생된 색상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반면 파란색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컬러로서 여자아이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심리에 스며드는 핑크 컬러

1979년 시애틀의 해군 교도소에서는 흥미로운 실험이 이뤄졌다. 미국의 실험심리학자 알렉산더 G. 샤우스(Alexander Schauss) 교수는 153명의 젊은 남자의 체력을 측정한 뒤 절반에게는 진한 파란색, 나머지 절반에게는 핑크색의 판지를 1분 동안 보여주었다.
그 결과 핑크색 판지를 바라본 남성들의 체력이 평균보다 약해진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같은 해 3월 1일, 샤우스교수는 시애틀의 해군 교도소 감방 중 하나를 핑크색으로 도색하고 죄수들의 폭력성을 관찰했다. 놀랍게도 도색 후 156일 동안 한 번도 폭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다른 소년원에 같은 실험을 해봤을 때에도 폭력 수치가 급감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이 신기한 현상에는 교도관의 이름을 딴 ‘베이커-밀러 핑크(Baker-Miller Pink)’라는 이름까지 붙게 됐다.
1980년대 아이오와 대학(University of Iowa)의 키닉 경기장(Kinnick Stadium)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이뤄졌다. 상대팀 라커룸을 핑크 컬러로 도색하여 에너지를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심리학을 전공했던 코치 헤이든 프라이(Hayden Fry)는 실제로 이 시도가 상대팀의 공격력을 감소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결과는 10년간의 꾸준한 연구 뒤에 큰 실효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학계에서는 앞다퉈 남성의 물리적 힘이 핑크 컬러와 장기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핑크 컬러는
부드럽고 향기로우며,
아름답고 애정이
깊은 느낌을 준다.
정서를 안정시키면서도
앳되어 보이는
색상이기에 순간
주목성이 높고,
단기간 공격성을
낮추는 한편 혈압을
낮추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i Love You!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핑크빛

17세기~18세기경 프랑스에서는 분홍을 일러 ‘로즈(Rose)’, 혹은 핑크 컬러를 유독 좋아했던 프랑스 왕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의 이름을 따 ‘로즈 퐁파두르(Rose Pompadour)’라 불렀다.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꽃을 닮은 까닭에 핑크 컬러는 부드럽고 향기로우며, 아름답고 애정이 깊은 느낌을 준다. 정서를 안정시키면서도 앳되어 보이는 색상이기에 순간 주목성이 높고, 단기간 공격성을 낮추는 한편 혈압을 낮추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징성이 짙은 탓에 언제나 도마에 오르곤 했던 핑크컬러. 이 색상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마음을 표현하는 꽃다발에도, 그 꽃을 받아든 소년·소녀의 뺨에도, 마침내 서로 꼭 잡은 손바닥에도 언제나 발그레한 핑크빛이 맴돈다. 그러므로 핑크는 남성도 여성의 것도 아닌 사랑의 색상일 따름이다. 누군가를 향한 진심에 색을 입힌다면, 그것은 분명 분홍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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