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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고종이
죽지  않았더라면?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이다. 1919년 3월 3일 고종의 국장일을 앞둔 3월 1일 시작돼 두 달여 동안 전국 방방곡곡에서 노동자, 농민, 학생, 양반 유생, 주부 등 전 계층의 국민이 만세운동을 벌인 3.1운동이 100주년을 맞는 것이다. 중국, 베트남, 인도 등 전 세계 피압박 민중의 가슴을 울린 전민중적 해방투쟁. 만약 고종이 죽지 않았더라면 3.1운동은 일어났을까?

| 최용범(역사칼럼니스트)

의문에 휩싸인 고종의 죽음

3.1운동은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런 고종의 죽음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고종이 독살됐다는 정황 증거가 있었다. 그 이전까지 건강했던 고종이 하루아침에 죽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전날 밤 궁중 나인 두 사람이 진상한 식혜 등 음료수를 마신 고종이 다음날 사망했으니 독살이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진상한 나인 두 사람은 며칠 사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배후에 이완용 등의 친일파가, 그 뒤에는 하세가와 조선 총독이 있을 것이란 것이 대다수 조선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최근에는 대원군의 부인 민씨 일가에게서 고종이 독살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영남 유생의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일제가 독살을 기획한 이유는 충분했다. 고종은 국권을 강탈당한 뒤에도 의병 세력을 은밀히 후원해왔다. 1907년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등을 밀사로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한 것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당시는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해 전 세계 식민지에서 민족해방운동의 분위기도 고양됐다. 만약 고종이 중국으로 탈출해 망명정부를 세우고 일제 강점의 부당성과 조선의 독립을 호소한다면 일본의 지배층으로서는 여간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전국 수만명의 백성이 만세를 부르다

3.1운동의 배경으로 10년에 걸친 일제 강압통치와 수탈에 대한 민중의 저항, 국내외의 독립투쟁, 전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기운 등이 거론되지만 당시 가장 직접적인 촉발 원인은 고종의 국상이었다. 당시 가장 큰 세력이었던 양반, 유생 세력은 촉박한 거사 일정으로 33인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국왕의 상을 최고의 예로 치는 만큼 3.1운동 초기 유림세력은 운동의 분위기를 달궜다. 양반 유생이 전국적으로 고종을 추대하는 망곡식을 올렸는데 경북 지방 23개 군에서만 230개소에서 거행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도보로, 배로 상경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고, 서울 관문인 남대문 정거장은 평소 1,500명이 이용했는데 2월 26일에 3천명, 27일에는 6천명 이상이 이용했다. 일본에 있던 유학생 7백명 중 절반이 귀국했다.
수만에 달하는 지역 사람들이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거나 이를 목격했다. 두 달 넘는 기간 동안 전국에 만세운동이 퍼져가고 일부에서는 면지서와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고, 무기고의 무기를 꺼내 폐기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45년간 재위했던 고종의 유림과 민중에 대한 영향력은 상당했다. 고종의 다섯째 왕자인 의친왕 또한 상해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다 만주 안둥에서 발각돼 조선으로 송환됐다. 일본에 인질로 있었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역시 상해 임시정부가 망명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왕족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권력에 흠집이 날까 두려워 영친왕의 귀국을 막았다. 영친왕은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물러나고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에나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환국 당시 영친왕이나 그의 동생 덕혜옹주는 인지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고종의 존재감이
컸던 만큼 그의 망명이
이뤄졌다면 한국사의
물줄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왕은 국민

만약 고종이 망명정부를 세우고 의친왕 등 왕족이 명맥을 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서울교대 함규진 교수는 이에 대해, “국권 상실 이후 1920년대까지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치고 고종과 맥이 닿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고종의 막대한 비자금은 독립운동의 자금원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망명했다면 상해임시정부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합법적 정부임을 공인받기 힘들었던 임시정부 대신 고종이 주도한 망명정부였다면 8.15광복을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맞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물론 한국독립운동사에 존재했던 다양한 분파와 분열양상을 떠올린다면 망명정부가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적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표권이나 상징성은 임시정부보다 유력했을 것이 분명하다. 1950년 영친왕과 덕혜옹주 환국에 전념했던 서울신문 도쿄특파원 김을한의 아들로 영친왕을 일본에서 직접 봤던 김수동 전 KBS 드라마국장은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았다면 상감마마로서 한반도를 통치할 분이라는 생각에 계속 긴장만 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종의 존재감이 컸던 만큼 그의 망명이 이뤄졌다면 한국사의 물줄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왕의 존재는 흔적도 없다. 국가권력의 주인은 왕도 대통령도 아닌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다고 밝힌 헌법 제1조가 그 뚜렷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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