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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면아, 랭면에 쫄지 마!

톡 하고 터지는 과즙만 봐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새콤달콤 향긋한 과일 향만 맡아도 그렇다. 보고, 냄새 맡고, 맛보지 않아도 이럴 때가 또 있다. 과일이 제게 딱 맞는 이름을 가졌을 때, 그리고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과일의 싱싱함을 한입 베어 문 듯 할 때가 있다.

| 한성우(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토마토가 제 이름을 갖기 까지

옛날 사람이 되어 이름을 하나 지어보자. 때는 16세기, 익으면 홍시처럼 붉어지는 과일인지 채소인지 애매한 것이 들어와 이름을 붙여야 한다. 여러 고민 끝에 한자를 좀 아는 이들은 남쪽 오랑캐 땅에서 온 감이란 뜻의 ‘남만시(南蠻枾)’라고 이름을 짓는다. 한자를 전혀 모르는 이들은 땅에서 나는 감이란 뜻의 ‘땅감’이라 짓는다. 그 중간 어름에 있는 사람들은 일년생 감이란 뜻의 ‘일년감’이라 이름을 짓는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헛되이 본래 이름인 ‘토마토’가 일본을 거쳐 들어온 ‘도마도’가 되어 일상의 이름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소위 본토 발음에 익숙한 세대들이 ‘토마토’로 고치기 전까지는.
다시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사람이 되어 이름을 하나 더 지어보자. 토마토보다 훨씬 더 작은 것이 등장했다. 본토에서는 ‘체리토마토(cherry tomato)’라 하니 그리 불러도 되지만 우리에게 ‘체리’는 낯설어서 도통 뜻이 들어오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큰 고민 없이 ‘미니토마토’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냥 가져다 쓰는 것은 탐탁지 않다. 누군가는 작고 귀엽다는 뜻으로 ‘애기토마토’라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한알 입에 넣고 오도독 터트릴 때의 느낌과 ‘애기’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방울토마토’라는 이름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크기도 모양도 딱 맞아떨어질 뿐만 아니라 소리도 귀엽다. 두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이 이름을 따른다.

많은 사람들이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외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 땅에서 난 것만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다른 땅에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먹어야 한다. 그것을 들여와 우리 땅에
심을 수 있다면 반쯤은 신토불이가 되니 그리 하는 것도 좋다.
귤도 오렌지도 아닌 낯선 그 이름, 자몽

토마토 시리즈는 잊고 주황색 껍질속에 여러 쪽으로 갈라지는 알맹이가 들어 있는 과일로 넘어가 보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귤’은 한자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한자성어 ‘귤화위지(橘化爲枳)’가 있으니 고유어라 우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한때 일본어 ‘미깡(ミカン)’을 쓰는 이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쓰는 이들이 없다. 방울토마토 크기의 귤이 소개되었을 때도 ‘낑깡(キンカン)’이라는 일본어를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대개 ‘금귤(金橘)’로 쓴다. 오렌지나 레몬도 고유어나 한자어로 바꾸어 쓸 수 있을 텐데 영어 이름이 득세를 하다 보니 그냥 굳어져 버렸다.
그런데 귤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닌, 그 친척쯤 되는 이상한 과일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영어로는 ‘그레이프프루트(grapefruit)’라고 하는데 ‘포도 과일’이란 뜻도 잘 안 들어오는데 발음도 영 입에 붙지 않는다. 외래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거나 입맛에 맞게 변형해서 쓰는 일본에서는 포르투갈어를 그대로 받아들여 ‘잠보아(ザンボア)’라고 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낯선 포르투갈어를 받아들여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던 중 시장 상인들 사이에서 ‘자몽’이란 이름이 등장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잠보아’와 ‘레몬’을 합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아이들 말장난이기는 하지만 ‘물귤’을 ‘뮬’이라 하고, ‘꿀귤’을 ‘뀰’이라 하듯이 ‘큰 귤’이란 뜻의 ‘큘’이라 하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어디서 왔든, 과일의 이름은 싱싱하고 새콤달콤해야 제 맛

많은 사람들이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외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 땅에서 난 것만 먹을 수 있으면 좋을텐 데 다른 땅에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먹어야 한다. 그것을 들여와 우리 땅에 심을 수 있다면 반쯤은 신토불이가 되니 그리 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그 때마다 이름을 붙이는 것이 문제다. 토마토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그렇고, 방울토마토가 등장했을 때도 그렇다. 갖가지 시도들이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고, 그 이름들이 부침을 반복하기도 한다. ‘땅감’이 ‘도마도’에 밀린 것은 안타깝지만 ‘방울토마토’가 ‘체리토마토’나 ‘미니토마토’를 누른 것은 통쾌하다. 특히 요즘의 나라 안팎 상황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자몽’은 생각하면 할수록 더없이 씁쓸하다. ‘잠보아’에서 ‘잠’을 따되 일본식으로 이것저것 떼 내어 ‘자’로 쓰는 것이 그렇다. ‘몽’도 레몬의 일본식 발음 ‘레몽’에서 따온 것이어서 그렇다. 정체 모를 ‘자몽’을 바꿀 말도 마땅치 않다는 것도 그렇다. 단지 그 이름에서 일본어의 냄새가 나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방울’에서는 톡톡 튀는 젊은 생각이 엿보여 상쾌하지만 ‘자몽’에서는 케케묵은 낡은 생각이 묻어나서 더더욱 불쾌하다.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생생해야 할 과일의 이름까지도 시금털털하게 바꾼 듯해서 찜찜하다.
과일의 참맛은 역시 싱싱한 새콤달콤함에 있다. 그러니 과일의 이름은 마땅히 싱싱하고 새콤달콤해야 한다. ‘남만시’는 중국의 남쪽은 오랑캐의 땅이라는 고루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으니 오래 갈 수 없는 이름이다. ‘체리’와 ‘낑깡’이 누군가에게는 익숙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익지 않은 과일 맛이니 역시 부적절하다. ‘자몽’은 정체도 불분명하고 기원도 모호하니 그 이름이 가리키는 과일의 쌉싸름한 맛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방울토마토가 고맙고도 반갑다. 딸랑딸랑 소리가 날 것 같은 그 싱싱함이 느껴지는 이름이.

* 이 글은 필자가 2016년에 펴낸 <우리 음식의 언어>에서 일부를 추려내어 다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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