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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시작을
담은 그림들

현대 세계에서 지배적인 경제체제로 자리잡은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한 사상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성장하고 변화해왔다. 자본주의의 성장을 주도적으로 이끈 부르주아 계층 역시 중세후기부터 차근차근 힘을 키우며 새로운 사회의 주인공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럽의 다양한 명화에서 초기자본주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태지원(<그림이 보이고, 경제가 읽히는 순간> 저자)

<게오르크 기체의 초상> (1532, 한스 홀바인)
젊은 상인의 초상,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다

화려하게 꾸민 사무실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사무실 안에는 털로 짠 양탄자, 북 모양의 탁상시계, 베네치아산으로 보이는 유리로 만든 꽃병, 동전이나 가위, 금, 장부 등의 물건들이 있다. 이 값비싼 소품들로 미루어 보아 그림의 모델은 젊고 부유한 상인으로 보인다. 위 작품은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한스 홀바인 2세의 <게오르크 기체의 초상>이다. 모델인 게오르크 기체는 대대로 상인이었던 집안의 사람이다. 그 역시 젊은 나이에 영국에서 상점을 열어 일했다. 이전까지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는 고객들은 주로 귀족이었다. 게오르크 기체는 귀족이 아닌 평민인 상인이었지만, 아마도 홀바인에게 그림을 의뢰할 정도의 재력이 있었던 듯하다. 상인 계층이 재력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게오르크와 같이 중세 말기부터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평민 계급을 ‘부르주아’(bourgeoisie)라 한다. 부르주아는 원래 프랑스어로 성(城)을 의미하는 bourg에서 유래된 말로,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중세후기에 성안에 살며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던 자유민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조상이었다. 그들은 중세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도시에 살며, 협동조합인 길드를 만들어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나갔다. 16~18세기에 이르러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부르주아들은 자본을 축적하며 그 지위를 다져나갔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자본가 계급으로 성장하며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게오르크 기체의 초상>은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부르주아 계층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재력을 겸비한 젊은 상인 게오르크 기체는 화려한 새틴으로 만든 옷을 입고, 그림을 감상하는 이에게 자신감 있는 눈빛을 건네고 있다. 또한 이 그림은 기체가 가진 상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작품속에서 12시와 1시 사이의 정오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는 신용을 나타내며, 유리병은 투명한 거래를 의미하고 있다.

<시장풍경>
(피테르 아르트센, 1550년경)
중세 후기부터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 계급은 부를 축적할 기회를 얻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얀 반 에이크, 1434)
부유한 상인이자 은행가였던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을 그린 작품으로 값비싼 옷, 화려한 방 장식 등을 통해 그들의 재력을 짐작할 수 있다.
<메디치 빌라가 있는 항구> (1637, 클로드 로랭)
항구가 풍경화의 소재로 사랑받은 이유

<메디치 빌라가 있는 항구>는 해가 뜨는 아침 무렵 무역선과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항구의 풍경을 담고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커다란 범선이 자리잡고 있고, 선원들은 배를 통해 가져온 물건들을 실어 나르느라 바쁜 모습이다. 그림 가운데에서는 일출 시간의 햇빛이 항구와 해안선을 밝게 비추고 있다. 이 작품을 그린 이는 바로크 시대 프랑스의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으로, 특히 항구의 모습을 많이 즐겨 그렸다. 그가 유독 항구의 모습을 즐겨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 그림이 그려진 당시 유럽 국가들은 절대 왕정의 지배 아래 있었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등의 절대군주들은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중상주의란 금이나 은 등 귀금속의 보유량에 따라 국가의 부(富)가 결정된다는 경제 이론이었다. 금이나 은은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부의 척도로 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금과 은의 보유량을 늘리기 위해 국가는 무역 흑자를 내야 했고, 이 때문에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제한하는 보호무역 정책을 실시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것에도 힘을 쏟았다. 절대 왕정은 식민지를 개척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식민지는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절대 왕정은 국내산업의 육성을 위해 제조업자와 상인들에게 독점권을 주고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대신 상인들은 왕정의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며 절대 군주들을 도왔다.
이런 측면에서 16~18세기의 항구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상인들이 무역 활동을 통해 국부를 늘리는데 이바지하는 중요한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주 무대였던 항구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찾는 상인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항구의 모습을 즐겨 그리는 화가들도 있었는데, 그 중 특히 클로드 로랭이 유명했다.
중상주의 경제 정책은 오랫동안 유럽 국가들을 지배하였고, 이 덕분에 국가의 보호를 받은 상인과 제조업자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전의 초기 단계, 상업자본주의가 출현한 것이었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
(1585년경, 윌리엄 세가르)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는 명언을 남긴 영국의 절대 군주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다.
<왕립과학원 회원들을 루이14세에게 소개하는 콜베르>
(17세기, 앙리 테스틀랭)
그림 가운데에 있는 검은 옷의 남자가 콜베르로 프랑스 루이 14세 시절의 재상이다. 그는 국부를 늘리기 위해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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